활동
민족문예운동가 용아 박용철
용아 박용철은 일제 강점기 ‘민족문예운동가’였다.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가 군국주의적 무단통치를 강화하면서 독립투쟁은 나라 밖에서만 가능하게 되었으며 국내에서는 문화운동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용아 박용철은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 문학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우리다운 문학과 조선 문학의 건설’을 실현하면서 우리의 순수문학 운동을 전개하여 한국 시문학의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시인으로서 ‘시문학파’를 창립하여 우리나라 순수서정시 시대를 열었고, 번역가로서 외국 문학을 번역해 문학의 지평을 넓혔으며, 비평가로서 문학 비평(평론)을 통해 양질의 문학을 완성 시켰고, 연극인으로 극예술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으며, 출판가로 발간문화의 선구자였다.
이렇듯 용아는 암울한 시대에 말살되어가는 우리의 문학예술을 창조적 경영마인드로 자금을 지원하여 우리나라 문학과 연극예술의 뿌리를 튼튼하게 만들어놓고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광산 소촌동 농촌에서 대농(오천석군)의 아들로서 태어나 타고난 천재적 기질을 가지고 경성 배제고등보통학교에서 1등을 하는 등 우수한 학창시절을 지내면서 항일 성향의 학보 ‘목탁’을 발간하기도 했다.
일본 동경 청산학원으로 유학하여 천재 학생으로 소문이 나면서 김영랑과 만나게 된다.
1923년 4월 동경외국어학교 본과 독어부에 진학하고 일본 관동지방 대지진 이후 국내에서 김영랑의 권유로 문학 활동을 하면서 기존 문학세계의 틀에서 벗어나 우리의 순수문학의 시대를 여는 등 ‘민족문예운동’을 펼쳤다.
시인, ‘시문학파’ 창립
용아는 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사재를 털어 자본을 지원하여 1929년 김영랑, 정지용, 정인보, 변영로, 이하윤과 함께 시문학 동인 ‘시문학파’를 창립하여 1930년 3월 이들의 순수서정시를 ≪시문학≫ 창간호에 실어 순수서정시 시대를 열었다.
그 후 신석정, 김현구, 허보와도 함께 했다. ≪시문학≫ 시집은 3호에서 그치고 말았다.
시문학 창간호에
“우리는 시를 살로 새기고 피로 쓰듯 쓰고야 만다.
우리의 시는 우리의 살과 피의 맺힘이다.”
대표 시로〈떠나가는 배〉〈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싸늘한 이마〉를 비롯해 자유시 71편 시조 12수, 한시 13수 총 1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시문학≫지는 한국 현대시의 언어미를 구축하고 순수 서정시로의 진로를 개척하는 한국시사韓國詩史에서 획기적 사건이다.
번역가
우리나라 번역문학의 선구자로 우리문학의 지평을 넓혔다.
독일 문학과 문학이론을 번역하고 영국, 미국의 시와 희곡을 번역하였다.
시 342편, 소설 2편, 희곡 7편을 썼다.
비평가
우리나라 비평문화는 기교주의 지상 논쟁에서 김기진의 기교주의 옹호에 대해 반박한 임화의 비평에 대해
용아가 본격적인 비판을 가하면서 촉발되어 비판(평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문학 발전의 계기를 이루었다.
1932년 1월 21일 자 동아일보 ‘센티멘탈리즘’
1932년 11월 문예월간 ‘효과주의 비평’ 논강
1935년 12월 24일부터 28일 동아일보 ‘을해시단 총평’- 1938년까지
1936년 3월 18일~ 19일 동아일보 ‘기교주의 설의 허망’
1936년 3월 21일~ 23일 동아일보 ‘기술의 문제’
1937년 12월 21일~ 23일 동아일보 ‘정축년 회고’ 시단
1938년 12월 7일 중앙일보 ‘신미 시단의 회고와 비판’
1938년 삼천리 문학 창간호 ‘시적변용에 대해서’을 기고하였다.
이렇듯이 비평(평론)의 극치를 보여 문학인을 깨우고 문학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시적변용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문학 작가의 기준이 되어 교과서적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극예술 운동가
일제의 문화예술 탄압정책으로 사라져가는 연극계의 ‘극예술연구회’ 간사로 활동하면서 공연자금을 지원하고 창작희곡 4편과 번역희곡 7편을 쓰고 연극에도 출연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1934년 4월 연극전문지〈극예술〉잡지를 창간하여 6호까지 발행하였다.
우리나라 초기 연극 예술의 초석을 다져놨다.
발간문화의 선구자
1930년 3월 〈시문학〉순수서정시집을 창간하여 3호까지 발간하였다.
1932년 12월 〈문예월간〉잡지를 창간하여 4호까지 발간하였다.
1934년 1월 〈문학〉잡지를 창간하여 3호까지 발행하였다.
1934년 4월 〈극예술〉창간하여 6호까지 발간하였다.
1935년 10월 〈정지용 시집〉발간하고
1935년 11얼 〈영랑 시집〉 발간했다.
1938년 타계한 후 1939년에는 〈박용철 시집 1권〉과 〈평론집 2권〉을 발간하였다.
용아의 35년의 짧은 생애, 마지막 8년 동안에 이룬 ‘민족문예운동’의 업적은 우리나라 순수문학의 시대를 열면서 ⌜우리다운 문학과 조선 문학의 건설⌟을 이뤘다.
용아는 창조적 경영마인드로 자금을 지원하여 문학예술인을 발굴하고 그들을 조명하여 오늘날, 찬란한 그들을 있게 한 후원자로서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한국의 현대문학 발전에 끼친 영향은 그의 천재적 능력과 헌신적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