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


중요민속문화재 지정 및 용아기념관 건립추진

연보

1904년

8월 2일(음력 6월 21일)
전남 송정군 송정면 소촌리 363번지에서 부친 박하준과 모친 고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두 형이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법률상 장남이 되다.

1907년(4세)

겨울
의병 투쟁이 격렬해지자 부친을 따라 외가와 가까운 전남 창평에서 지내다.

1908년(5세)

창평에 머무르면서 사자소학을 깨치다.

1909년(6세)

부친 박하준이 전남 광주읍에 집을 마련하여 광주에서 살게 되다.

1910년(7세)

한글을 깨우쳐 신소설을 읽고 산수를 배우다.

1911년(8세)

4월 10일
광주공립보통학교(현 광주서석초등학교)에 입학하다.

1913년(10세)

아우 박남철이 태어나다.
박남철은 일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시립병원장으로 재직하다 한국전쟁인 1950년 납북되었다.

1915년(12세)

3월 24일
광주공립보통학교 졸업하다.

1916년(13세)

4월
경성 희문의숙에 입학했다가 배재고보로 전학하다.

1917년(14세)

배재고보 2학년
수학에 천재성을 발휘하다.

1919년(16세)

모친 고광의 병환과 3․1절 만세운동의 발발로 학업을 중단하다.

겨울
울산김씨 김희숙과 결혼하다.

1920년(17세)

7월까지
배재고보에 재학하다가 학업을 중단하다.

겨울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편입학 시험 준비를 하다.

1921년(18세)

4월
동경 청산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학하다.
청산학원 중학부 5학년 재학 중이던 영랑 김윤식을 만나 친교를 맺다.

1923년(20세)

3월
청산학원 중학부를 졸업하다.

4월
동경외국어학교(현 동경외국어대학) 본과 독어부에 입학하다.

1학기를 마치고
귀국 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다.

9월 10일
연희전문학교 문과 1학년 2학기 전학하다.
이때 위당 정인보의 지도를 받으며 수주 변영로, 윤심덕 등과 친교를 맺다.

1924년(21세)

5월
최초의 창작희곡 <해피나라>를 연희전문학교 교지 <연희>에 발표하다.

9월 19일
연희전문학교를 휴학하고, 첫 금강산 여행하다.

1926년(23세)

주로 고향에 머물면서 문학수업을 하다. 창작희곡 <말 안하는 시악시>가 연희전문학교 학생극 대본으로 선정되어 공연되다.

1927년(24세)

3월 15일
1년 6개월의 향리생활을 접고 상경하다.

6월 7일
위병 악화로 세브란스병원에서 5일간 입원하여 치료를 받은 후 11일 퇴원하다.

6월 24일
함경남도 안변군 삼방약수터로 요양여행을 떠나다. 23일간 요양하는 동안 화가 이당 김은호를 만나다.

8월 19일
상경

10월 1일
영랑 김윤식과 금강산 여행을 떠나다. 갑작스런 위병 악화로 상경하다.

10월 11일
평동에 거처를 정하고 영랑과 함께 연말까지 지내다.

1928년(25세)

2월
영랑과 함께 시 잡지의 출판에 대한 결정적인 의논을 하다.

9월
배화 학생극 대본으로 창작 희곡 <석양>을 써서 공연되다.

1929년(26세)

고향 소촌리에 머물면서 시작 및 영시, 독일시 번역에 전념하다.
<떠나가는 배>, <이대로 가랴마는>,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등이 이 시기에 쓰여지다.

9월
동생 박봉자의 이화여전 선배인 임정희와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애정을 키우다.

10월 22일
영랑 김윤식과 함께 시 잡지 발간을 실행하기 위해 상경하다.

10월 25일
정지용을 만나다.

12월 10일 경
위당 정인보, 수주 변영로 등과 만나다.

1930년(27세)

3월
옥천동 자택에 출판사 “시문학사”를 설립하다.

3월 5일
시문학동인 김영랑,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등과 함께 <시문학>창간호를 발간하다.

5월 20일
<시문학>2호를 발간하다.

가을
견지동으로 이사하여 자택을 출판사 “시문학사”사무실로 병용하다.
<시문학>3호를 발간하려 했으나 원고부족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발간이 늦춰지다.

1931년(28세)

2월
숙부상을 당하여 소촌리로 내려가 부인 김씨와 실질적으로 이혼하다.

가을
이하윤과 종합문예지 발간을 계획하다.

10월 10일
<시문학>제3호를 발간하다.

11월 1일
이하윤과 함께 종합월간문예지 <문예월간>창간호를 발행하다.
출판사명을 “시문학사”에서 “문예월간사”로 바꾸다.
<문예월간>을 통해 박용철의 문학세계가 시론 및 평론, 변역소설 등으로 확장되기 시작하다.

12월 1일
<문예월간> 제2호를 발간하다.

1932년(29세)

1월 1일
<문예월간> 제3호를 발간하다.

3월 1일
<문예월간> 제4호 쾨테 특집으로 발간하다.

3월
적선동으로 이사하다.

5월 20일
임정희와 결혼하다.

1933년(30세)

7월
장티푸스로 병원에 입원하다.
박용철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다.

8월 10일
아들 종달이 출생하다.

12월 4일
“극예술연구회”가 동인제에서 회원제로 조직개편되자 회원으로 정식 입회하여 기획부간사를 맡아 극운동에 힘쓰다.

1935년(32세)


정지용과 김영랑과 함께 폐병으로 병석에 있던 임화에게 병문안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시집 발간의 합의을 보고, 지용와 영랑의 시집 발간 준비를 하다.
<극예술>제3호가 발행되다.

10월 27일
<정지용 시집>을,

11월 5일
<영랑시집>을 발행하다.
이때 이하윤의 번역시집 <실향의 화원>도 간행하다.

1936년(33세)

5월 12일
<영랑시집>출판기념회를 개최하다.

5월 29일
<극예술>제4호가 발행되다.

7월
3남 종률이 출생하다.

9월
박봉자가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하다.

9월 29일
<극예술> 제5호가 발행되다.

가을
사직동으로 이사하다. 영화에 상당한 관심을 갖다.

가을
정지용, 이헌구, 구본웅 등과 문예지 <청색지>발간 계획을 세우다.

1937년(34세)

1월
<청색지> 발간취지서를 문인들에게 발송했으나 창간은 무산되다.

3월
아우 만철의 입학시험 응시를 기회로 한 달 정도 일본 경도와 동경을 여행하다.

8월
강원도 통천군 송전해수욕장으로 여행하다.

가을
정지용과 함께 금강산을 여행하다.

겨울
초부터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하다.

1938년(35세)

1월
부친의 병환 때문에 하향하였다가 하순 경 병세가 위중하여 급상경하다.

2월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병이 악화되다.

3월
성모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계속하다.

5월 12일
오후 5시 서울 사직동 자택에서 후두결핵으로 타계하다.

5월 15일
사직동 자택에서 영결식을 마친 후 전남 광산군 송정면 우산리 산 3번지에 안장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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