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학파
1930년대 창간된 시전문지 『시문학』
1930년대 창간된 시전문지 『시문학』 을 중심으로 순수시 운동을 주도했던 시인들을 시문학파라고 한다.
시 문학파의 핵심인물은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이며, 여기에 정지용, 위당 정인보, 연포 이하윤의 참여로 창간호가 발간되었고, 뒤이어 수주 변영로ㆍ김현구가 제2호에, 신석정ㆍ허 보가 제3호에 동참하였다. 『시문학』은 1930년 3월 5일 창간하여 그해 5월 20일 제2호, 1931년 10월 10일 제3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풍미했던 카프문학과 감각적 모더니즘에 휩쓸리지 않은 채 이 땅에 순수문학의 뿌리를 내리게 한 모태가 되었다.
시문학파의 태동

[시문학파 동인 창립 기념사진]
1929년 앞줄 왼쪽 부터 김영랑, 정인보, 변영로,
다음줄 왼쪽부터 이하윤, 박용철, 정지용.
시문학파가 형성된 1930년은 일제의 문화통치(1920년대)에서 무단통치로의 전환기이다. 따라서 국내의 문단 상황은 일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목적의식은 같았지만, 사회주의식 문학운동과 순수민족문학운동간 심각한 대립 양상을 보였다.
이것이 곧 1925년을 기점으로 1935년까지 10년 간 지속된 프로문학파와 민족문학파간의 대립이다.
이러한 1920년대의 문단현실에 1927년부터 ‘해외문학파’ 가 순수문학론을 들고 나옴으로써 문학논쟁은 한층 가열되는 계기를 맞았다. ‘해외문학파’ 에서 발아된 순수문학 운동은 ‘시문학파’ 에 이르러 구체화 되었고, 이 후 ‘구인회’ 와 모더니스트, 그리고 『시원』과 『시인부락』으로 이어지면서 1930년대 한국 현대시의 맥을 형성하였다.
시문학파의 문학사적 의의
『시문학』지는 1930년 3월 5일 창간하여 그해 5월 20일 제2호, 1931년 10월 10일 제3호를 끝으로 종간되었지만, 당대를 풍미했던 카프계열의 프로문학과 감상적 낭만주의 사조에서 벗어나 이 땅에 본격적인 순수문학의 뿌리를 내리게 한 모태가 되었다.
시문학파의 문학사적 의의는 첫째 1920년대의 이데올로기 문학의 근본적 결함을 극복하고 시의 자율성을 확보한 점, 둘째 시적 기교와 전통적인 가락을 통해 순수시의 새 경지를 개척한 점, 셋째 1920년대와 1930년대 시문학의 분획점으로서 현대시의 분수령을 이룬 점 등을 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