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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민속문화재 지정 및 용아기념관 건립추진

용아생가, 국가 문화재 승격을 위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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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 조회 758회 작성일 23-01-1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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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생가, 국가 문화재 승격을 위한 제언

 

 

 

김선기 (문학평론가 전남도립대 강의교수)

 

 

 

 

1. 용아생가의 가치

주지하다시피 용아 박용철은 190482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363번지에서 태어나 1930년대 김영랑·정지용과 더불어 시문학창간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또한 박용철은 문예월간, 문학, 극예술등 문예지를 잇달아 발행하여 영국, 미국, 독일 등의 외국 문학을 소개함과 동시에 한국문학의 자주적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데 큰 몫을 한 문학인이다.

그러나 용아 박용철의 다양하고 깊이 있는 문학 활동이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고, 문예 운동가로서의 박용철의 총체적인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새삼스러운 지적은 아닐 것이다.

사실, 박용철의 생애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 기간은 불과 8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한 사람의 행위에 대한 가치평가는 결코 그 행위가 이루어진 기간의 길고 짧음이나 행위의 결과만을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문학인이자 문예 운동가로서의 박용철이 8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 놓은 업적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박용철이 그동안 한국 문학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현실을 문제 삼아 그 업적을 과대평가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마땅히 경계해야 하지만, 그가 1930년대 한국 현대문학 발전에 공헌했던 업적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함도 마땅한 일일 것이다.

이 글은 문학사로나 문화사적으로 가치가 큼에도 관심 밖에 있는 용아생가의 가치 창출 방안과 문화콘텐츠로서의 발전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따라서 문화재 활용사업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강진 영랑생가의 운영사례를 비교 분석하여 본 고의 목적을 구현코자 한다.

 

2. 용아 영랑생가의 문화재적 위상 비교

 

1) 용아생가 (광주시 기념물 제13)

용아생가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363에 있는 박용철의 집으로써 198627일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됐다. 이 집은 그의 고조부가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실제 건립연대는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안채는 정면 5, 측면 2칸 규모로 맨 왼쪽은 부엌으로 전면에는 부엌방을 두었으며, 중앙 2칸은 방으로 4분 합문을 달았고 나머지 2칸은 2짝 여닫이의 자 살문이다. 창호는 걸쇠를 걸어 들어 열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2자 높이로 자연석을 바른 층 쌓기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전면은 두리기둥을 세우고 측면과 내부는 네모 기둥을 세웠다. 서까래 위에 부연을 얹은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사랑채도 5칸 집으로 우측으로부터 부엌, , , 마루의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그 외에 사당이 있는데 정면 3, 측면 1칸인 맞배집이며 서재는 원래 초가집이던 것을 시멘트 기와로 얹었다. 행랑채는 4칸 집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다.

용아생가는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몸채의 초가지붕을 시멘트 기와로 교체하고 부속 건물은 슬레이트로 개량했었으나 1995년 다시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용아(龍兒) 박용철(朴龍喆, 1904. 6. 21 ~ 1938. 5. 12)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6년 광주보통학교(, 광주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휘문고보에 입학했다가 바로 배재학당으로 전학, 1920년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퇴했다. 그 뒤 일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1923년 도쿄 외국어학교 독문과에 입학했으나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자 귀국했다. 귀국 후 연희전문에 입학했으나 몇 달 뒤 자퇴하고 문학에만 전념했다. 19385월 후두결핵으로 타계(34)했다.

그가 문학에 뜻을 둔 것은 아오야마 학원 시절 김영랑을 만나면서부터다. 1930년 김영랑·정지용과 함께 시동인지 시문학을 창간해 편집과 재정을 맡아보면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하게 된다. 시문학창간호에 싸늘한 이마,떠나가는 배, 비 내리는 밤등을 발표했다. 1931문예월간에 이어 1933문학지의 편집을 맡아보면서 번역가· 비평가로 활동했다.

1935년 시문학사를 운영하면서 정지용 시집·영랑시집을 펴냈으며, 해외 문학과 극예술연구회에 참여해 입센의 인형의 집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특히 193512월에 발표한 올해 문단 총평에서는 김기림과 임화의 시를 비판하고 정지용의 시를 옹호해 임화와 기교주의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 뒤 발표한 평론 시적 변용에 대하여(삼천리문학, 1938. 1)는 그의 시론의 뿌리를 보여준 평론으로써 계급주의와 민족주의 문학 모두를 배격하고 존재로서의 시론, 즉 선시적인 것에 더욱 의미를 두었다. 1996년 한국문인협회가 용아생가를 <한국 현대문학 표징 제11>로 지정해 표징 물을 세웠으며, 정부는 2001년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2) 영랑생가(국가 민속문화재 제252)

영랑생가는 전남 강진군 강진읍 영랑생가길 15길에 있는 영랑 김윤식(1903~1950)의 집이다. 영랑은 이곳에서 1903116일 부친 김종호와 모친 김경무 사이에 2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3월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영랑은 이듬해 상경하여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수학한 후 휘문의숙에 진학하였다.

휘문의숙 재학시절이던 19193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영랑은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강진으로 내려와 독립운동(강진 44 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 등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에서 수학한 영랑은 용아 박용철과 친교를 맺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후에는 시 창작활동에 몰두하였다.

영랑은 1930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등과 함께 시문학지를 창간하고 한국 현대 시의 새장을 열었다. 19344월 박용철이 발행한 문학3호에 불후의 명작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발표하였고, 1935영랑시집, 1949년에는 영랑시선을 출간하였다.

영랑은 조국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한 채 흠결 없는 대조선인으로 의롭게 살았다. 광복 후 조국 정부에 참여하였던 영랑은 1950년 한국전쟁 때 퇴각하는 북한군의 포탄 파편에 맞아 9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생애 87편의 시를 남겼다.

1996년 한국문인협회가 영랑생가를 <한국 현대문학 표징 제7>로 지정하여 표징 물을 세웠다. 영랑생가는 1948년 선생이 서울로 이사한 후 몇 차례 전매되었으나, 198512월 강진군이 매입하였고, 19862월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0710월 국가 민속문화재 제252호로 승격되었다. 정부는 2008년 금관문화훈장을,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3. 영랑의 모란과 생가 활용

 

박용철 생애와 문학 공간에 대한 문화 콘텐츠화의 논의에 앞서 김영랑의 문학 자원을 문화콘텐츠로 개발하여 성공한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강진군 시문학파기념관은 영랑 김윤식이라는 작가적 브랜드 가치와 그의 대표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모티프로 문화콘텐츠를 개발하여 연간 5만여 명(2019년도 기준)의 문학 답사객을 불러들였다.

강진군 시문학파기념관은 2012년부터 2022년까지 11년째 문화재청 지역문화재 활용사업 공모사업(23억원)에 선정돼 모든 사업을 국비로 운영하고 있다. 대표적인 문화콘텐츠는 주민 큐레이터와 함께하는 영랑생가 목요음악회(주민주도형) 영랑 감성 아카데미(강진교육청 정규 교육과정 편성 운영) 영랑 예술학교(사회적 배려형) 영랑 어린이 시인학교(교육형) 영랑생가 사랑방 이야기 프로그램을 주민주도형으로 운영, 영랑생가(국가민속문화재 제252)의 문화재적 가치 창출은 물론 지역관광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이 프로그램은 2016년 전국 지자체 가운데 최초로 문화재청'명예의 전당'에 등재된 바 있는 명품 콘텐츠다.

또한 강진군은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는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소재가 된 모란을 산업화하기 위하여 201510영랑 모란을 브랜드로 정하고 상표를 출원하였다. 이를 통해 강진군은 지역브랜드로서의 가치를 선점하는 한편 관련 연구기관과 공동으로 모란 유, 향수, 샴푸 등 가공제품을 연구·개발하였다. 나아가 영랑생가 일대에 모란공원을 조성하여 강진만의 감성적 볼거리도 제공하였다.

모란공원은 김영랑의 모란을 테마로 하는 문학공원으로 자연경관을 최대한 활용한 친환경적 생태문학공원으로 조성했다. 총 사업비 30억 여 원이 투입된 모란공원 조성사업은 사계절 모란을 감상할 수 있는 유리온실과 세계 각국의 다양한 모란의 자태를 느낄 수 있는 세계 모란원, 김영랑의 추모 동상, 약수터 물을 이용한 생태 연못, 공원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정자 등이 20164월 조성됐다.

 

 

4. 용아 브랜드의 문화사적 가치

 

한국의 많은 유명 문인들의 경우 고향과 생활 무대가 유리된 이력을 남기게 돼 사후에 그의 생가와 성장지에 대해 강력하게 의미 부여를 할 수 없게 된 경우가 적지 않다. 그에 비하면 용아 박용철은 주요 작품의 무대도 그러한데다 생의 시작과 끝을 고향에서 함께한 193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인이다.

박용철은 190482일 광주에서 태어나 34세 길지 않은 생애를 마치고 1938512일 고향에 묻혔다. 따라서 광주 곳곳에서 박용철의 삶의 궤적과 그의 문학 공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광주에 박용철의 문학 자원이 많다는 것은 문화콘텐츠로의 가공 요소가 그만큼 확보되었다는 것이다.

박용철의 대표적인 문학 공간으로는 용아생가를 들 수 있다. 이 집은 198627일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어있다. 특히 용아 생가는 193035시문학창간호에 발표한 박용철의 등단작 떠나가는 배, 이대로 가랴마는,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등이 이곳에서 창작된 문학 공간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뿐만 아니라 용아생가는 19299월 여동생 박봉자의 이화여전 선배인 임정희와의 연서를 교환하며 애정을 키웠던 박용철의 사랑의 공간이기도 하다. 아울러 19966월 한국문인협회와 SBS문화재단이 용아생가 마당에 한국 현대문학 표징 제11호를 세워 박용철의 문학사적 가치를 기린 것도 또 하나의 문학적 리소스다.

이와 함께 박용철이 19114월부터 1915년까지 다녔던 광주공립보통학교(, 광주 서석초등학교)가 현존하고 있어 유년 시절 용아의 삶의 궤적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박용철은 광주공립보통학교 재학시절 해마다 개근상과 우등상을 받는 등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있어 문화콘텐츠로서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또한 광주광역시 광산구 우산동 산 3번지에 자리한 박용철 부부의 묘소와 광주공원과 송정공원에 세워진 시비는 박용철의 삶의 궤적과 문학적 흔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광주공원에 있는 용아 시비는 1970년 조직된 영랑·용아 시비 건립위원회가 전국적으로 건립기금을 모아 영랑의 시비와 함께 세운 것이다. 그해 12월에 제막된 영랑과 용아 시비에는 각각 두 시인의 대표작 떠나가는 배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각각 시인의 연보와 한국 시문학에 끼친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광주공원에 세워진 쌍둥이 시비는 박용철 · 김영랑의 돈독한 우정을 상기하는 상징물로서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한 중요한 문학적 리소스가 될 것이다.

그리고 송정공원에 있는 박용철 시비는 19851115일 광주시 광산구에 의해서 건립된 것이다. 시비에는 박용철의 얼굴이 부조되어 있고 그의 대표작 떠나가는 배의 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문학 공간 역시 용아생가 ~ 송정공원 시비 ~ 박용철의 묘소 ~ 광주공원 시비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해줌으로써 박용철의 삶과 문학적 궤적을 더듬는 중요한 원천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박용철은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어수선했던 시절, 시문학 동인을 결성하고 순수서정시지 시문학을 창간하여 주옥같은 시를 발표하며 1930년대 한국 시문학을 견인했다. 또한 그는 종합문예지인 문예월간을 주재하여 발행했는가 하면 현대 시사에 신선한 충격이 된 정지용, 김영랑 시집도 자비로 출간해주었다. 이후 박용철은 잡지의 격조를 한 차원 높인 문학을 기획하여 발간하게 되고 연극연구단체인 극예술회에 참여하여 버나드쇼와 입센, 세익스피어, 안톤 체홉등 외국 시를 번역 소개하는 한편 극예술연구회 기관지인 극예술을 발행하였다.

이처럼 짧은 생애 동안에 눈부신 활약을 했던 박용철은 광주로서는 다시 얻을 수 없는 대표적인 문학 아이콘이며 브랜드다. 순전히 콘텐츠라는 의미에서 박용철은 지역에서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자해 유지 보호해온 다른 어떤 유적지 못지않은 부가가치를 발생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4. 용아생가, 국가 문화재 승격을 위한 제언

 

이상과 같이 용아생가(시도 기념물 제13)와 영랑생가(국가문화재 제252)에 대한 비교분석을 통해 용아생가의 국가 문화재 지정에 대한 당위성을 고찰하였다.

박용철의 문학 공간이 광주의 문화산업을 부흥시키는 매개가 되려면, 먼저 용아 생가의 국가 문화재 지정이 급선무다. 문화재는 다양한 종류만큼이나 그 격도 천차만별이다, 다시 말해서 관리감독 주체가 지자체냐, 국가이냐에 따라서 지원액의 규모가 다르다. 앞서 밝혔듯이 국가 문화재인 영랑생가의 경우 모든 관리감독권을 문화재청이 갖고 있다. 따라서 용아생가의 국가 문화재 격상은 매년 소요되는 유지보수비는 물론 문화재 관련 국비 공모사업 선정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춘 셈이다. 여기에 용아생가와 연계하여 <용아 박용철 문학관>을 건립한다면 문학적문화사적 시너지 효과는 클 수밖에 없다.

차후 과제로, 용아생가를 중심으로 송정공원 시비 ~ 박용철의 부부 묘소 ~ 광주 서석 초등학교(광주공립보통학교 전신) ~ 광주공원 시비를 잇는 용아 문학 벨트화 구축도 검토할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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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기는 전남대 국문학과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25년의 문학 전문기자와 시문학파기념관 관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문학 공간의 미학을 비롯해 시문학 공간과 문화콘텐츠, 남도 현대 시문학의 산책5권이 있으며, 현재 전남도립대 교양학부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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