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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철의 시적 가치와 새로운 가능성’(김병호 협성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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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조회 781회 작성일 23-01-1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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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철의 시적 가치와 새로운 가능성

김병호 (협성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30년대는 우리 근대시문학사에 새로운 형태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식민지 한국의 1930년대는 3·1운동 직후 일제에 의해 표방되었던 문화정치'가 자취를 감추고 일제 군벌에 의한 무단정치가 노골적으로 표면화된 시기였다. 1931년 만주사변의 이면에는 대륙침략을 위한 전초기지 건설뿐만이 아니라, 식민지 한국을 영구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몽 문제 해결'이라는 저의가 깃들어 있었다. 따라서 이를 계기로 한국에 대한 일제의 식민정책도 재편성되었으며, 지금까지의 경제적 수탈을 위한 식민지로서가 아니라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게 되었다.

독재체제를 강화하면서부터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요하는 한편, ‘··만 블록 경제'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군수물자 확대를 위한 군수산업의 개발에 힘써 한국의 예속화와 자원의 착취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내선일체라는 말로 집약시킨 일제의 식민정책은,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경제적 침탈은 물론 민족정신 말살 정책을 단적으로 함께 드러낸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민족사적 측면에서 30년대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힘든 시기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 모순의 소용돌이 속에서 저항하는 민족적 운동의 동원(動員)이나 동학·위정척사와 같은 종교적 운동의 동원도 없었던 시기였고, 19세기 말의 독립협회나 20년대의 민족사학과 같은 지성적 동원도 없었던 시기였으며, 의병운동이나 3·1운동과 같은 민족적 동원도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므로 민족의 지성사를 설정할 만한 좌표를 찾지 못하였다.

다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민족의 생명을 이어준 민족적 비원의 자기 성취는 조선어학회(1931)'를 중심으로 한 한글 연구와 진단학회(1934)’를 중심으로 한 한국사 연구, 그리고 이육사를 비롯한 몇몇 시인들의 활동을 통해 민족정신 수호를 위한 문화적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국외적으로는 상해임시정부와 재미 교포의 외교활동,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만주와 상해를 중심으로 한 항일 무력투쟁 등을 통해 반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국내적으로는 문화적 저항운동과 국외적으로는 무력투쟁이 항일운동의 주류를 이루게 된 데에는 첫째, 국내에서는 일본 군국주의의 강화로 인해 조직적인 반일 무력투쟁이 불가능했다는 점, 둘째 국제적으로는 도덕적 동정 이상을 받지 못했던 한국의 독립이, 일제의 만주침략으로온 천하에 입증되어 오히려 활기를 띨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등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내성적 성격의 민족운동에까지 무력적 폭거를 해 왔으며, 민족주의 성향의 단체에 대한 탄압은 물론 무력을 통한 민족정신 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또한 반일사상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켜 일부 민족지도층 인사들의 전향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1930년대에는 자주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사상적 좌표마저 상실될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30년대는 일제가 무력을 앞세워 식민지 한국에 있어서 독재 체재에 알맞는 새로운 조선 지배 정책, 즉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 건설, 민족정신 말살정책, 식민지 한국의 예속화 등을 강행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일부의 친일 세력을 제외한 모든 한국민들은 물리적인 궁핍과 정신적인 위축감으로 빈사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날 그날을 연명해야 했으며, 지조 있는 지식인들은 가중되는 일제의 폭력으로 불안과 고뇌에 찬 절망적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한편 1930년대의 한국문학은 강화된 일제의 무단정치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다양성은 근대시문학사에서 1930년대 시문학 작품이 차지하는 중요성과 위상에 관한 논의를 무성하게 하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는데, 이를 단편적으로 정리해 보자.

우선 1930년대의 시단 특징을 살펴본다면, 문인들의 숫자가 많아졌다는 점, 서구문학의 수입이 보다 직접화되고 그 영향력이 보다 증대된 점, 작품 창작의 기술적 세련과 문예이론의 전문화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시사에서 30년대가 가지는 중요성 및 발전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30년대와 관련된 논의에서 항상 한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것은 1930년대의 시가 1920 년대의 시의 부정에서 비롯되었으며, 시문학파에서 그 발아를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논의는 전대의 문학적 유산을 지속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한 다음의 문학사적 발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의 악랄한 검열제도와 우민화 교육정책 때문이겠지만, 상상력의 자유로운 일탈이 꽉 막혀버렸기 때문에 식민지 후기의 한국시는 깊이 있는 시를 창조하지 못한다. 이미지즘의 영향을 받아 시를 회화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려는 경향과 재래적인 운율에 집착하여 시의 음악성을 고집하는 경향 외에 자신의 내적 고통을 외적 현실에 투사하고, 외부의 정경을 자신의 내적 경험으로 환치시키는 어려운 시인을 식민지 후기의 한국시는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식민지 치하의 독자들에게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해방 후에 시집이 발간되어 비상한 주목의 대상이 된 윤동주가 어느 정도까지 그 작업을 수행했을 따름이다.

 

위의 발언은 1920년대 근대시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소월이나 만해 같은 시인들과 30년대 후반기의 백석·이용악 등의 시작 활동을 고려할 때 부당한 것이 되고 만다. 이와 같은 기존의 논의를 20년대와 30년대 문학의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문학사 이해와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금 조명해야 하고 이러한 시문학의 물줄기가 해방 이후의 것으로 연결된다는 차원에서 온전한 자리매김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1930년대는 여러 부류의 시들이 다양하게 실험되면서 꾸준히 변화 발전된 시기였는데 크게 프로문학파, 모더니스트들의 부류, 시문학파를 계승한 순수서정시 계통의 시로 구분해 정리해 보기로 한다.

 

첫째는 프로문학파의 경향을 들 수 있다. 이는 1930년대의 시가 1920년대의 시의 부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관점에서 흔히 그들 의 시적 성과를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이 1920년대의 신경향파 시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민족과 민중들의 세계를 새로운 시형식 속에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1930년대 시의 한 경향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임화, 박세영, 권환, 이찬, 백철 등의 프로시는 1·2차 검거(1931, 1934)와 카프의 해산(1935)을 계기로 크게 위축되었지만, 그 시정신과 시의 형상화 방법은 그 이후에도 영향을 미쳤다.

 

둘째는 시문학파이다. 모더니즘 시운동의 선두주자 역할을 했던 정지용은 시의 예술성은 시 본영의 순수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자각에서 현재의 서정을 개척하는 일에 주력하게 되는데, 이런 작업은 동시대의 박용철, 김영랑 등과의 만남에서 구체화된다. 이들이 시적 경향을 드러낸 것은 시문학문학이라는 동인지와 문예월간이라는 잡지인데 신석정, 정인보, 이하윤 등도 함께 했다. 물론 이들 모두가 동일한 시적 경향을 나타낸 것은 아니지만, 이들 집단은 방향성에서 순수서정시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점과 시어에 대한 자각을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시문학파의 서정시 운동은 모더니즘이 전개되던 시기에 구체화되었다가 모더니즘이 한창 꽃피던 시기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1930년대 말에 등장하여 자연에서 인간의 진실을 찾으려 했던 청록파의 시세계로 계승되었다.

 

셋째는 이른바 모더니즘이다. 모더니즘은 비록 운동 자체로는 성립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20년대 중반에 정지용·박팔양 등에 의하여 시작 경향이 나타나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문단의 변화와 이양하, 최재서, 김기림 등의 이론가들에 힘입어 문단의 전면에 그 윤곽을 확연히 드러내게 되었다. 이어 구인회(九人會)가 조직되고(19338) 새로운 동인들의 가담과 그외 시인들이 이 운동에 합류함으로써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T.E., 에즈라 파운드, T.S. 엘리어트 등 서구 모더니스트에 영향을 받은 바 큰데, 그 수법은 대개 이미지즘의 수법이다.

1930년대에 이런 모더니즘의 시적 특성을 나타낸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정지용, 김기림, 김광균, 장만영, 이상, 장서언, 이시우, 신백수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지향하는 것은 다름 아닌 도시어, 문명어 또는 사물어를 사용한 회화성에 의한 사물의 객관화인데 이들 역시 모두 같은 경향을 나타낸 것은 아니다. 이상은 특이한 시형태를 통해 인간의 잠재의식과 역동적 상상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정감을 경시하고 감각적 표현에 치중하던 모더니즘의 시작 태도를 극복하면서 나타난 생명파를 포함한 일군의 시인들이다. 그들이 다름아닌 서정주, 유치환, 김상용, 김현승, 이육사 등이다. 이들은 시전문지 시원』 『시인부락』 『시건설』 『낭만』 『시인춘추』 『자오선등을 통하여 생명력의 고양이라든가, 고독의 절대성, 생과 자연의 관조 혹은 지사적 면모를 보여주는 등 각기 개성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동일한 위치에 놓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각기 우리 시에 서정성을 심화시켜 주고 그 폭을 넓혀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문학사적 맥락 안에서 우리는 박용철에 주목해볼 필요와 가치가 있다. 그는 단순히 시문학동인을 결성하고 시문학을 주재 창간하여 우리 근대시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이룩한 유능한 시인이며 잡지 편집인에 그치지 않는다. 전통적 서정을 새로운 양태에 담아내려했던 시창작을 위시하여 시론과 해외문학의 번역 소개 등 우리 문학사에 쏟은 열정과 노력의 업적은 단편적 평가를 거부한다. 특히 자신의 시집은 출간하지 않았으면서도 시문학동인을 함께 하던 영랑과 지용의 시집을 먼저 출간함으로써 그가 우리 시문학사에 당대의 시단에 미친 공적과 헌신에 대해서는 정당한 평가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당대 시단을 흐름을 이끌었던 그의 대표작 떠나가는 배시문학창간호에 발표된 것으로 상실에 대한 은유적 형상화가 잘 이루어진 작품으로 꼽힌다.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안윽한 항구-ㄴ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가치 물어린 눈에도 비최나니

골짝이마다 발에 익은 뫼ㅅ 부리모양

주름쌀도 눈에익은 아-사랑하든 사람들

 

버리고 가는이도 못낮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화살짓네

앞대일 언덕인들 미련이나 잊슬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거냐

나두야 가련다

-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전문(1930)

 

이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삶의 현장에서 누구든 희비가 엇갈리는 만남과 헤어짐이 있으니 떠나는 마음이나 보내는 마음이 이별의 정한에 사무쳐 가슴 아파하는 일이 그칠 줄 모른다. 그리고 정봉용의 지적처럼 이 시에는 '나 두 야'와 같이 낭독할 때에 발하는 목소리'처럼, 억양과 장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리듬이 있고, 수미쌍관법의 반복적 의미의 반복이 있고, 몇 개의 시적인 매력을 풍기는 시어의 선택과 어감의 강조를 위한 의도적인 어법의 무시 등 뛰어난 기교의 표현들이 집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실의식'이다.

 

조국을 등지고 떠나야 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비애를 평이하지 않은 리듬과 이미지로서 표현하고, 상징의 의미보다는 직설적인 언표로 선명하게 주제를 드러내고 있음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뫼ㅅ부리처럼 주름쌀도 눈에익은 사랑하는 사람들"인 민족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시인의 눈에 안개처럼 눈물이 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조국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가슴에 밀려드는 서글픔은 그나마 쫓겨가는 이의 처절함에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1930년대에 우리 민족은 일제의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해외로 유랑의 길을 떠났다. 일제의 탄압은 특히 젊은 사람들의 의욕을 꺾고 실의에 빠지게 하기에 청년들은 참다운 일을 찾아 '앞 대일 언덕'도 없이 떠나가게 된다. 고국을 떠나는 사정이 타의에 의해서이기 때문에 '화살짓네'라고 말한다. 망명의 모습을 상상하며 박용철은 조국을 떠나는 배로 비유하면서 울적한 심경을 노래하고 있다.

 

고향은 찾어 무얼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흐너진데

저녁 가마귀 가을 풀에 울고

마을 앞 시내도 넷자리 바뀌었을라.

 

어릴 때 꿈을 엄마 무덤 우에

남겨 두고 떠도는 구름따라

멈추는 듯 불려온지 여나무해

고향은 이제 찾어 무얼하리

 

하날가에 새 기쁨을 그리어보랴

남겨둔 무엇일래 못잊히우랴

모진 바람아 마음껏 불어쳐라

흩어진 꽃닢 쉬임 어디 찾는다냐.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 생각

-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길이언만

서로의 굳은 뜻을 남게 앗긴

옛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 박용철의 고향전문(1932)

 

이 작품에서도 상실감과 회의감은 고향은 찾어 무얼하리'라는 구절에 집약된다. 그리고 어릴 때 꿈을 엄마 무덤 우에/남겨두고 떠도는 구름따라'라는 표현 속에서 옛날의 꿈은 현실에서 사라지고 그로 인해 떠도는 구름 따라 외로운 방랑객으로 변한다. '모진 바람아 마음껏 불어쳐라/흩어진 꽃닢 쉬임 어디 찾는다냐'며 가쁜 호흡으로 고향의 상실로 인한 괴로움을 모진 바람으로 변화시켜 그것을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잃어버린 그리움의 대상은 찾을 길 없고 다만 여기서는 사변으로 일관하는 데 머물고 만다. 마지막 연에서는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 생각이라고 하여 고향의 상실감을 통해 현실의 어두운 세계를 잠시 떠올리고 답답한 심사임을 표현한다.

특히 마지막 연에서 사랑을 상실을 현실에 비유하여 나타내는데 이것은 또 다른 확대 해석을 이끌 수 없는, 현실 인식의 의미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현실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고 다만 시적 자아의 사변에 머물고 말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30년대의 억압적 현실 속에서 용아 박용철은 자신의 내면세계로 시선을 돌리고 은유적 세계를 노래한다. 같은 시문학파였던 김영랑이 당대의 카프와 모더니즘에 휩쓸리지 않고 순수한 문학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고향의 풍광과 언어에 고향의 이미지와 향토적 소재를 행간에 녹여 넣은 것처럼, 박용철 역시 일제의 수탈을 피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당대 민중들의 비애와 슬픔을, 그리고 상실감에 젖어 한숨과 눈물로써 세월을 보내야 했던 젊은이들의 내면세계를 고유한 운율 속에 담아내고 있다.

 

신성한 것보다는 흥미로운 것, 이념과 믿음보다는 효율과 실용이 현실적 가치로 대접받는 현대 사회에서 박용철이 보여주었던 서정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닌다. 그의 시는 현실적 주체가 그 자신만이 그려내고 꿈꾸는 서정적 정서를 순연하게 표출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의 언어 안에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동경의 언어가 가득하고, 이루어져야 할 것에 대한 의지의 언어로 뒤덮여 있다. 1930년대 가파랐던 우리 시단의 한복판에서 박용철은, 변화된 상황에 대응하는 시적 인식의 양상과 새로운 독법의 의미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서정시의 존재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 소통의 유효한 방식을 모색하려는 고뇌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90여년 뒤에 남아 있는 우리에게 유효한 언어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반성적으로 살펴볼 과제를 안겨준다.

 

우리의 현재적 삶은 용아 박용철이 시문학동인들과 함께 숨쉬었던 시절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주도적 이념과 코로나 팬데믹 등으로 세계는 전례 없는 혼란과 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우리의 삶은 권위주의적 산업화와 민주주주의 체제의 미숙으로 수많은 희생과 좌절, 시행착오의 비용을 치러야 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생성된 삶의 불합리한 구조는 제도적 미비와 의식적 미성숙으로 이전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존중과 예의, 믿음과 성실, 가족과 이웃 같은 전통적 가치 규범은 이미 소실되었고 이러한 가치 규범에 기반한 공동체적 질서 역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개발과 발전, 효율과 생산성, 가성비 등 자본주의적 가치가 지배적 시대 이념이 되면서, 우리의 성과와 업적이 생활의 율법이 되어버렸다. 물론 효과나 실용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만큼 인간과 그 삶을, 우리 삶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개인적으로 동의할 만한 가치의 일반 준거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용철이 의지와 실천으로 지켜왔던 우리 문학의 전통적 가치는 강제된 근대화와 역사단절로, 신자본주의의 파고 속에서 폄훼되거나 말소되었다.

하지만 1930년대의 박용철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지금 우리의 삶이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으며, 이전의 가치 규범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이 박용철의 시적 가치와 새로운 가능성이 놓여있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삶의 반성을 통해 우리 삶의 의의와 미래적 방향을 정립하려 했던 용아의 시정신이 더욱 간절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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